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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태종무열왕 문무왕 이야기

무열왕은 역전의 군주로서 당시 신라는 위기상황이었죠 선덕여왕부터 시작된 국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겨우 나당동맹을 맺었던 것이며 진덕여왕제위때 부터 시작한 왕권강화 재정부 사법부 관리를 감찰하는 부서 실무의 집사부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왕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진덕여왕 시기는 삼두정치라고 할수있는 모습을 보이는에 김유신 알천 김춘추 이렇게 세사람이 실세가 됩니다.

 

고구려 백제와 다른길 내정개혁 유교사상을 기초로한 왕권강화를 하였죠 알천공이 개척한 군진을 지원하여 백제에 대한 방어를 하였고 고구려와 맞서면서 내정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이유로 무열왕이란 호칭이 생겼죠 이름자체가 유교식이죠 자신에게 양보한 알천공을 고이 보내주고 조상인 소벌도리를 왕으로 추증하죠 백제정벌을 위해 준비를 하다. 삼년산성에서 5만대군을 양성하면서 추정하면 백제의 내분을 유도했죠 바로 반간계였죠 의자왕과 실세인 성충과 흥수를 축출하고 이듬해에 41명의 왕자들을 좌평에 임명하면서 분봉한 결과 왕과 귀족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이죠 그 것이 아마도 반간계를 사용한 정황이라 추정됩니다. 영화 황산벌 대신의 대사 "3년전 왕이 왕자들 41명전부 좌평으로 임명하면서 부터 우덜 나라를 없어져 버렸제" 좌평만 아니라 그들에게 토지를 분봉한거 보면 의자왕도 탄현과 기벌포카드가 중요한거 알지만 그 플랜을 사용하려면 전제조건이 귀족들에게 양보해야 하는데 이미 그 터닝포인트를 잃어버렸죠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올때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추정됩니다.

 

사실 진제국도 천하 통일할때 군신사이를 이간질 시켜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였죠 당시 의자왕이 동원할수 있는 군사가 3만명이고 그중 5천을 좌평충상에게 주어서 황산벌에서 싸우게하고 나머지는 당나라군과 싸웠죠 결과는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이 항복하고 계백은 전사하죠 그리고 30명이 포로가 됩니다. 나당연합군이 침공한지 열흘만에 의자왕이 포박당한 정황을 보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증거죠 게다가 의자왕이 포박당한것도 내부배신자가 있었던 것이고 항복할때 무열왕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는등 복수를 달성합니다. 백제부흥군 토벌을 위해 총지휘를 하다.

 

삼년산성은 그야말로 백제 정벌의 전초기지이며 삼년산성에서 출발하였죠 아마도 원활한 보급을 위해서 삼년산성에 머물렀습니다. 친정하면서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익산까지 진격하죠 하지만 노환으로 인해서 타지에서 승하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힘겨루기에서 역전승을 거두었죠 게다가 그 외침에 불구하고 내치도 다졌습니다. 그의 죽음은 드라마에서 시해로 나오죠 인재등용 골품에 상관없어 인재를 등용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죠

 

강수를 자신의 브레인으로 삼죠 그는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3대를 섬기죠 백제의 멸망을 시키지만 도중에 승하해서 드라마에선 시해당한것으로 하였지만 왕인이상 수천명의 갑사들의 호위를 뚫기 어렵죠 복수를 위해 외교 내치 국방개혁을 하여서 역전시킨 군주죠 의자왕과 다르게 강도높은 개혁으로 역전했죠 무열왕은 소수림왕 포지션입니다. 왕권강화가 외국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강도높은 개혁과 과감한 인재등용등 적절한 시기에 하는 것이 중요한 사례가 바로 무열왕이 보여주었죠 뒤를 이은 문무왕도 부친의 정책을 계승합니다.

 

전란의 명군 문무왕 그의 탄생이야기 문무왕 김법민은 사실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김춘추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죠 사실 유신이가 두사람이 서로 야스하게 만들어서 임신한 문희를 화형시킨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덕만공주가 서라벌을 순회할때였죠 결국은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그가 6살때 덕만공주가 즉위합니다. 문과 무를 동시에 갖춘인재 떡잎이 푸른 법민은 문무를 동시에 갖추었고 태자시절 강수가 그의 스승님이라서 제왕수업을 유교식으로 받습니다. 부왕의 정책을 계승 골품을 가리지 않고 인재등용을 하였던 부왕의 정책을 계승합니다.

 

민심을 수습하다. 사면령을 내려서 민심을 수습합니다. 당의 갑질에 민심이 흉흉하다보니 사면령을 내렸죠 고구려에 대한 온건책 사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다는 이치를 알고있는 군주죠 고구려와 화해시도는 하려했지만 좌절되었죠 취리산 화맹에서 당은 결코 신용하지 못하는 대상이란 것을 알았죠 하지만 집안싸움으로 인해 막타를 먹일뿐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여 당에 대한 관계는 적으로 돌아서죠 나당전쟁 나당전쟁을 선빵치고 시작하여 그야말로 당과 척을 지게 되죠 럭키가이 사실 육로로 밀고오면 당은 신라를 이길수 있지만 이시기부터 반란과 더불어서 토번이 변경을 침략하죠 당의 병력은 이리저리 분산되는 바람에 신라와 효과적인 싸움을 하지 못하였죠 외교적 해결로 시간벌기 왜에는 중립을 지키라고 하였고 당에는 자주 사죄하는 사신을 보내서 시간벌기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대한 연구 전란의 와중에도 신라어학에 대한 연구에 지원을 하죠 치고박고 싸우다 보니 군사행정도 힘들었죠 한문때문에 그래서 이두와 구결이란 어학연구가 시작됩니다. 승전하면 승전의 기쁨을 나눈다. 승전보가 오면 승전의 기쁨을 민중들과 나누었습니다. 군신의 단합을 강조하면서 왕권강화를 시도하는데 나당전쟁때 사원전의 지급을 중단하는데 이는 고려의 현종조차 시도하다가 중단된 것을 문무왕은 나당전쟁이 끝날때까지 합니다. 전쟁이 끝난뒤에는 병장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고 행정제도를 정비하여 9주5소경의 초석을 다집니다. 국학도 그때 준비하였죠 갈문왕제도를 폐지하고 상수리제도를 실시하는등 국가체제의 정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전란의 명군이면서 럭키가이인 문무왕이죠